결혼 생활이라는 것도 다른 사회생활, 조직생활과 다를 바가 없다. 서로 사랑하는 두 사람이 결혼하는 것까지는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사랑에 의존해 결혼생활을 유지하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사랑이란 어디까지나 우연의 산물이다. 집단은 우연에 의해 존속되는 것이 아니라 구성원들의 충성에 의해 존속되며 충성이라는 것은 꼭 좋아서 하는 것이 아니다. 소속 집단에 대한 구성원의 충성도가 떨어질수록 집단 구성원의 결속은 느슨해지고 결국 쉽게 와해되기 마련이다. 집단의 유지를 오로지 우연에 맡기고 운명을 탓하려면 아예 집단을 구성하지 않는 것이 낫다.

 

-그사이

 

 

이런 식으로 원인을 찾아보는 건 하나마나한 일이다. 끝까지 가보면, 내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의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태어났기 때문이라는 대답만이 남게 된다. 내가 하는 생각이라는 게 이렇다. 무슨 일이 있으면 습관적으로 그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것은 연구자로서의 직업병이라기보다는 자격지심에 기인한 것이다. 스스로에게 납득 가능한 변명거리를 만들기 위한 것이다. 곧 자기합리화를 위한 것이다. 적절한 수준의 자기합리화는 필요 불가결한 일이다. 자기합리화의 과잉은 자기기만으로 이어지고 결여는 자기비하로 귀결된다. 우리가 읽고, 쓰고, 생각하는 이유는 어쩌면 효과적으로 자기합리화를 해내기 위해서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리 효과적으로 잘해낸다 해도 자기합리화는 자기합리화일뿐이다. 우리가 왜 헤어졌는지 나는 수십 가지의 그럴싸한 이유를 댈 수 있다. 온갖 이론들을 갖다붙여 두툼한 논문이라도 쓸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아무리 세련된 논문을 만들어낸다 해도 내 삶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내 분석이란 사후약방문도 못 되는 것이다.

 

-연체

 

아내는 내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유리창 너머 어두운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작은 목소리로, 그러나 분명하게 아내가 말했다.

 

"우리는 왜 같이 살아?"

나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아내는 금기를 깼다. 그런 종류의 질문은 서로 던지지 않기로 암묵적으로 합의가 되었다고 나는 생각했다. 생각 없이 살기 위해서는 왜, 라는 질문을 던지면 안 된다. 커피를 탈 때 설탕, 프림을 몇 스푼 넣느냐는 종류의 질문과 그에 대한 대답만으로 사는 것이 가장 편하게 사는 방법이다.

 

-

 

결혼에 실패하는 사람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모두 행복한 결혼을 꿈꾸었다. 그 때문에 실패한 것이다. 바라는 바가 많지 않다면, 그러니까 행복 따위는 기대하지 않는다면 혼자 사는 것보다 결혼하는 것이 낫다.

 

-

 

"닉네임은 왜 파니로 한 거야?"
"파니핑크로 하려 했는데 다른 사람이 이미 쓰고 있는 아이디여서 파니로 한 거야. 그 영화, 원제가 뭔지 알아?"

"뭔데?"

"Keiner liebt mich. 아무도 날 사랑하지 않아. 바로 내 얘기거든."
"아니, 그건 내 얘긴데."

 

아무도 파니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닐 것이다. 또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그 사람이 우리가 바라는 사람이 아니기에 우리는 아무도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 우리는 결코 아무하고나 사랑할 수 없다. 아무하고나 결혼할 수 없다. 누구나 저마다의 기준이 있다. 그것이 눈에 보이는 것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그 기준에 부합하는 사람이어야만 비로소 그 아무에 속하게 된다. 그리하여 결국 아무도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다. 사랑에 관한 한 우리의 마음은 우리의 의지대로 되는 것이 아니어서 우리조차도 결코 서로 사랑하게 되지 않기 때문이다.

 

-

 

 

운동 같은 건 시간 낭비다. 몸은 노화한다. 건강하게 오래 살고 싶으면 머리 쓰는 일을 피하고, 적게 먹고, 몸을 움직이지 말아야 한다. 사람들을 만나는 것도 그리 좋은 일은 아니다. 술이란 건 많이 마시면 몸에 해롭고, 적당히 마시면 정신건강에 해롭다. 취하지 않은 어정쩡한 상태에서 불 꺼진 집으로 혼자 터덜터덜 걸어 돌아오는 길은 쓸쓸하기 이를 데 없으니 말이다. 그걸 피하기 위해 취할 때까지 마시면 출근길이 힘들다.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기에는 피곤한 세상이다. 하지만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가려 해도 생각이라는 것은 의지와는 별개로 자기 멋대로 자기반복, 자기 증식을 끝도 없이 해대면서 머릿속을 헤집고 돌아다닌다. 그런 밤에는 잠이 오지 않는다. 수면제도 소용이 없다. 수면제로 효과를 볼 수 있는 사람이라 해도 오래가지 않아 중독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한번 중독되면 벗어나는게 쉽지 않다. 그리고 수면제를 먹어도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날이면 부작용만 커진다. 일상생활을 하기 곤란할 정도로 멍한 상태가 되는 것이다. 항우울제도 모든 사람에게 효과가 있는게 아니라고 말했던가. 가만히 있어도, 발버둥을 쳐봐도 삶은 조금씩 조금씩 나빠지기만 한다. 어디까지 나빠질 수 있는지, 우리는 그 밑바닥을 짐작조차 할 수 없다.

 

-

 

 

"울증 증세가 있으시네요. 스트레스 때문일 겁니다. 가급적 마음을 편히 가져보세요. 바쁘시겠지만 운동도 좀 해보시면 좋겠네요. 일단 그렇게 지내보시고 전혀 효과가 없으면 다시 오세요. 그때 투약을 해보도록 하지요."

 

나는 피식 웃었다. 예전에 처음으로 정신과 상담을 받을 때에 의사에게 들었던 이야기와 다르지 않았다. 프로작 같은 항우울제도 모든 사람에게 효과가 있는 건 아니다. 가령 나 같은 사람에게는 소용이 없다. 프로작을 먹었더니 오히려 무기력증이 더 심해져쏙, 그에 따라 울증도 더 심해졌다. 내 경우에 항우울제 복용의 유일한 긍정적인 효과는 약을 먹기 전의 상태가 최악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했다는 것이다.

 

 

-생명의 전화

 

Posted by 김쥴리



나는 유난히 창녀라는 말에 끌리는것 같다.

최근 읽은 책 제목에만도 벌써 두번째 등장한다.

 

 

오랫만에 "재미있는 이야기"를 읽었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이야기의 시간적 배경은 16세기이다.

공간적 배경은 로마와 베네치아.

 

이야기는 1527년 로마에서 시작한다.

주인공은 로마 최고의 창녀 피암메타 비안키니.

 

 

아름다운 외모와 영리한 머리로

부와 고급 창녀라는 명성을 이룩하지만 전쟁이 모두 앗아가버린다.

재기를 위해 로마에서 베네치아로 건너간다.

 

"소개글"을 인용하면,

가문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결혼할 수 없었던 젊은 남자들.

지참금을 아끼기 위해 수녀가 되어야 했던 젊은 처녀들.

하수 처리되지 못한 욕망이 부유하는 그들 사이에,

그녀 피암메타가 있었다.

 

 

여튼 막판에 그녀는 엄청난 실수를 저지르는데,

(그걸 말하면 재미 없겠지?)

 

 

진짜 오랫만에 푹 빠져서 읽은 책이다 ^ ^

지루하지 않고, 뒷이야기가 점점 더 궁금해지는 그런 책이었다.

 

 

 

 

 

In the Company of the Courtesan, Sarah Dunant

Posted by 김쥴리




예전에 읽었던 플라스틱 피플이 엄청 생각나는, 대리사랑.

 

 

 

우리는 확실히

사람들을 점점 더 믿기 어려운 환경에 놓여지는거 같다.

그렇다고 지금 당장 내 주위에 소중한 사람들을

의심하고 싶은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언젠가 이들이 진실되지 않은 관계임을 폭로할 날이 올...

수도 있다는 생각을 조금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 그때 시릴이 아주 묘한 어조로 물었다.

"세상에서 제일 공포스러운 생각이 무언지 알고 싶니?"

그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려 밤하늘을 응시했다.

나는 감히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내 침묵을 동의로 받아들였는지,

허공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이 세상이 정말로 존재한다는 거야."



Posted by 김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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